사군파에서는 파조인 김익경(金益卿)의 손자(孫子) 김진문(金振門)이 고려(高麗)말(末)에 예의판서(禮儀判書)를 거쳐 대제학(大提學)에 올랐으나 조선(朝鮮)이 개국(開國)하자 관직(官職)을 버리고 이색(李穡), 박자검(朴自儉) 등과 함게 은둔(隱遁) 생활(生活)하여 절의를 지켰으며, 그의 둘째 아들 김추(金錘)는 도총관(都摠管)을, 넷째 아들 김석(金錫)은 찬성사(贊成事)를 지냈다. 막내 김조는 세종(世宗) 때 집현전수찬(集賢殿修撰)을 거쳐 예조판서에 올랐으며, 직제학(直提學)을 역임(歷任)할 때 장영실(蔣英實)과 함께 간의대(簡儀臺), 자격루(自擊漏), 혼천의(渾天儀) 등을 만든 것으로 전한다. 특히 그는 벼슬이 옮겨질 때마다 몽은제(蒙恩祭)를 올리는 충신(忠臣)으로서도 이름이 났고, 세종(世宗)이 평소(平素)의 소원을 묻자 "백년 동안 날마다 어탑(御榻 : 임금이 앉는 제구)을 모시고 금규화(金葵化) 앞에 진퇴를 엎드려 묻기를 원합니다"라고 대답(對答)한 것으로 "필원잡기(筆苑雜記)"에 전한다.
한편 김진문(金振門)의 6세손 김극희(金克禧)가 명사수(名射手)로 이순신(李舜臣) 장군의 막하에서 전공을 세우고 한산도 싸움에서 전사(戰死)했으며, 그의 조카 김완(金完 : 학천군 김극조의 아들)은 역전의 명장(名將)으로 이름을 날렸다. 임진왜란(壬辰倭亂) 때 남원대첩(南原大捷)에 공을 세웠던 그는 1624년(인조 2년) 이괄(李适)의 난을 평정 할 때 벽동(碧潼)의 성(城)을 사수(死守)했던 명장(名將)으로 이름이 높았다.
김우(金宇)의 아들 김여준(金汝峻)은 볼모로 잡혀가는 소현세자(昭顯世子 : 인조의 맏아들 인열왕후 한씨의 소생)와 인평대군(璘坪大君)을 호종한 18장사(壯士)의 한 사람으로 중국 심양에 갔을 때 옥하관(玉河關)에서 세자를 소리 내어 울렸다는 "월명비안(月明飛雁)"의 노래를 읊어 더욱 명성(名聲)을 떨쳤으며, 그의 용력(勇力)에 힘을 뽐내며 목숨을 건 결투(決鬪)를 신청해 온 청나라 장수 우거(禹巨)의 코를 문질러 이김으로써 병자호란(丙子胡亂)의 굴욕과 인질로 잡혀가는 세자를 호종하는 비애 등 백성(百姓)들의 원한(怨恨)을 풀었다고 한다. 그후 세자(世子)가 돌아와 즉위(卽位)한 다음에도 이 슬픈 기쁨과 옥하관의 달밤 일을 못 잊어 과거의 시제(時題)에 "월명비안(月明飛雁)"의 노래를 자주 출제하였다 한다.
송상현(宋象賢), 유극량(劉克良)과 더불어 삼충절(三忠節)로 일컬어진 김동광은 회양 부사(淮陽府使)로 재직시 임진왜란(壬辰倭亂) 일어나 성이 함락(陷落)되자 좌우(左右)를 피난시키고 성의 정문 앞에 조복단장한 채 관인을 쥐고 단좌하여 적에게 저항하다가 참살당하여 예조참판에 추증되었다.
중조 시조의 51세손 김익경(金益卿)
공간공(恭簡公) 조(조)파
도총관공(都摠管公) 추파
상서공(尙書公) 감(감)파
생원공(生員公) 구(구)파
생원공(生員公) 련(련)파
찬성공(贊成公) 석(錫)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