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해김씨 유래

가락국(駕洛國)에는 본래(本來) 아도간, 여도간, 피도간, 오도간, 유수간, 유천간, 신천간, 오천간, 신귀간 등 아홉 촌장이 각 지방을 다스렸는데 서기(西紀) 42년 3월에 구지봉(龜旨峰)에서 이상한소리가 났다. 아홉 촌장(村長)과 사람들이 올라가자 "산봉우리에 흙을 파며 '거북아 거북아, 머리를 내밀라. 만약 머리를 내지 않으면 구어먹겠다.'라고 하면서 춤을 추면 곧 임금을 맞이할 것이다."라고 하자 그대로 하였더니, 자줏빛 줄이 하늘에서 땅에 닿아 있었다. 그 끈의 끝에 붉은 보자기에 금으로 만든 상자가 싸여 있으므로 이것을 열어 보니 둥근 황금알 여섯 개가 있었다.

 

이것을 아도간의 집으로 가져가자 다음날 이 알이 여섯 어린아이가 나왔는데, 제일먼저 나온 아이 이름을 수로(金首露, 42~199.3.23)로 하고 그달 보름에 왕으로고 나라 이름을 가락(대가야)이라하고, 나머지 다섯 사람도 각기 5가야(伽倻)의 임금이 되었다고 한다. - 이상은 "삼국유사" 중에서 -

 

그중 먼저 나온 수로는 금알에서 나왔다 하여 성을 김으로 하였다. - 이상은 "개황력(開皇曆)" 중에서 -

 

이 수로왕(首露王)을 시조(始祖)로 하는 성씨(姓氏)가 바로 김해김씨(金海金氏)이다. 김해는 가락국의 고도로서 지명도 여러가지로 변했으나 고려 충선왕(忠宣王)때 김해부가 설치(設置)됨으로써 본관(本貫)을 김해(金海)로 하였으며 가락김씨라고도 불리 우고 있다.

 

수로왕(首露王)이 즉위(卽位) 7년에 아유타국(현재 인도 중부지방의 고대국가)의 공주(公主)인 허황옥(許黃玉, 33~189.3.1)을 왕비(王妃)로 맞이하여 10남 2녀를 낳았는데 맏아들은 김씨(金氏)로 왕통(王統)을 잇고 두 아들은 왕비(王妃)의 간곡한 요청(要請)으로 왕비(王妃)의 성인 허(許)씨(태인허씨)를 주었다. 그리고 나머지 일곱 아들은 불가(佛家)에 귀화(歸化)하여 하동 7불이 되었다고 한다. 또한 허씨에서 갈라져 나온 인천이씨가 있으며 세 성씨가 다같은 혈족이라며 종친회(宗親會)도 '가락중앙종친회'로 하였다.

 

김해 김씨(金海 金氏)의 중시조(中始祖)는 수로왕(首露王)의 12세손(世孫)인 김유신(金庾信)장군이다. 김유신(金庾信)은 가락국(駕洛國) 마지막 왕인 구형왕(仇衡王)의 증손(曾孫)자이며 무열왕(武烈王)의 딸 지소 부인(智炤夫人)과 혼인(婚姻)하였다. 할아버지는 신라(新羅)의 장군(將軍)이자 각간(角干)인 김무력(金武力, 구형왕(仇衡王)의 막내 아들)이고, 아버지는 당대(當代)의 이름난 장군(將軍)인 김서현(金舒玄), 어머니는 진흥왕(眞興王)의 동생인 숙흘종(肅訖宗)의 딸 만명(萬明)이다.

김유신(金庾信, 595년 ~ 673년 8월 18일 (음력 7월 1일)) : 김해김씨의 중시조이다. 동생을 태종무열왕 김춘추(金春秋)에게 시집보내고, 그의 딸(지소부인)을 부인으로 맞았다. 성골에서 왕위를 이을 사람이 없자, 매부인 김춘추를 태종무열왕에 세웠으며, 태종무열왕·문무왕와 함께 삼국통일의 대업을 달성했다. 그 후 42대 흥덕왕에 이르러 흥무대왕(興武大王)으로 추존되었다. 동생 흠순(흠춘)은 문무왕 대에 백제 부흥군을 격파하였으며, 당나라 군사와 함께 고구려를 정벌할 때 대당총관이 되어 큰 공을 세우고 각간이 되어 나라를 평안케 했다.

김보(金普) : 충정왕 때 지밀직사사(知密直司事)가 되고, 공민왕이 세자로 원나라에 있을 때 판도 판서(版圖判書)로 시종한 공으로 즉위한 후 1등 공신에 올랐다. 공민왕 측근서 권력을 잡고 친족들을 요직에 앉혔으나 모친상을 당하자 그와 권세를 다투던 김용(金鏞)ㆍ정세운(鄭世雲) 등의 간계에 의해 강제로 3년상을 입음으로써 복직하지 못했다. 1363년(공민왕 12) 김용이 제거되고 3년상이 끝나자 김해 부원군(金海府院君)에 봉해졌으나 대역죄(大逆罪)로 주살(誅殺)된 기철(奇轍)의 일당으로 몰려 가라산(加羅山)에 유배되었다가 1335년 신돈(辛旽)이 집권하자 도첨의 찬성사(都僉議贊成事)를 거쳐 좌시중(左侍中)이 되고 충근양절동덕공신(忠勤亮節同德功臣)이 되었다. 뒤에 신돈에게 국정을 위임함이 옳지 않다고 누차 왕에게 건의하여 신돈의 미움을 받아 파직되었다.

김극일(金克一, 1382년∼1456년) : 어릴 때부터 조부모와 부모를 지성으로 봉양했고, 장성한 뒤에는 장인 김서의 간곡한 관직 진출 요청이 있었으나, 양친을 봉양해야 함을 이유로 거절하고 성심을 다하여 모셔서 효행으로 명성을 떨쳤다. 또한 아들 김맹(金孟)은 물론 손자 김준손(金駿孫)·김기손(金驥孫)·김일손(金馹孫)의 훈회에도 정성을 기울여 이들 모두가 문과에 급제할 수 있는 학식과 절행으로 명성을 떨치는 토대를 이루게 하였다. 벼슬은 통덕랑(通德郞) 사헌부 지평을 지냈다.

김조(金?, 미상 ~ 1455년) : 어려서부터 글을 즐겨 특히 역산(?算)에 정통, 문과에 급제한 후 예문검열(藝文檢閱)을 비롯하여 인동 현감(仁同縣監)ㆍ집현전 수찬 직제학(集賢殿修撰直提學)ㆍ승지ㆍ예조 판서에 이르렀다. 집현전에 있을 때, 간의대(簡儀臺 : 천문대)ㆍ자격루(自擊漏 : 물시계)의 제조에 관여하였다.

김일손(金馹孫, 1464년 2월 13일(음력 1월 7일)~ 1498년 8월 14일(음력 7월 27일)) : 조선 성종 때 문과에 급제하여 춘추관이 되어 ‘성종실록(成宗實錄)’의 사초를 썼다. 하지만 전라도 관찰사로 재직 중이던 이극돈의 비행을 직필하고, 상소하여 원한을 샀다. 그러다가 세조의 왕위찬탈을 규탄하는 김종직의 ‘조의제문(弔義帝文)’을 ‘성종실록(成宗實錄)’에 실었다가 이극돈·유자광 등 훈구파의 모함을 받았다. 그로 인해 발생한 무오사화로 스승 김종직은 부관참시(剖棺斬屍) 당하고, 김일손은 참수(斬首)되었다. 중종반정 이후 신원되어 도승지에 추증되고, 목천의 도동서원과 청도의 자계서원에 배향되었다.

김대유(金大有, 1479년 ~ 1551년) : 1498년(연산군 4) 무오사화로 김일손이 화를 당하였을 때 아버지와 함께 호남에 유배되었다가 1506년(중종 1)에 풀려났다. 1507년 진사가 되고, 1518년 행의유일(行誼遺逸)로 전생서직장(典牲署直長)에 서용되었으나 사직하고 고향인 청도로 돌아갔다. 1519년 현량 문과에 3등과로 급제한 뒤 성균관전적·호조좌랑 겸 춘추관기사관·정언·칠원현감(漆原縣監) 등을 두루 역임하였다. 그러나 같은 해에 일어난 기묘사화로 현량과가 혁파되자, 관작·과제(科第)를 삭탈당하였다. 1545년(인종 1) 현량과가 복과(復科)되면서 전적에 재서용되어 상경하던 도중에 병이 나 향리로 돌아가 죽었다. 현량과 천목(薦目)에서 "기우(器宇)가 뛰어나고 견식(見識)이 명민(明敏)하다."는 평가를 받았다. 청도자계서원(紫溪書院)·선암사(仙巖祠)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탁영연보(濯纓年譜)』가 있

김경서(金景瑞, 1564년~1624년) : 무과 출신으로 임진왜란 때 여러 차례 공을 세웠고 특히 평양에서는 큰 승리를 거두어 난이 끝나자 포도대장에 임명되었다. 후금(後金)이 건국하자 명나라의 원병 요청으로 강홍립(姜弘立)의 부원수로 출정하였다. 명나라 군사가 후금에게 패하고 원수(元帥) 강홍립이 후금에 항복, 포로가 되자 그는 적진에 머무르면서 일기로 적정(敵情)을 기록하여 보내려다가 강홍립에게 발각 피살되었다. 후에 우의정에 추증하였다.

김완(金完, 1577년 ~ 1635년) : 임진왜란 때 용맹이 알려져 전라도 병마 절도사 이복남(李福男) 휘하에 들어갔고, 이때 무과에 급제, 경상도 방어사(慶尙道防禦使)의 막하로 있다가 전라도 병마 절도사 이광악(李光岳)을 따라 남원(南原)에 갔을 때 아버지를 무고하여 죽게 한 한덕수(韓德脩)가 병력을 점검하므로 찔러 죽이려다가 실패했다. 1615년(광해군 7) 관무재시(觀武才試)에 급제, 고산진 첨절 제사(高山鎭僉節制使)를 거쳐 창성 방어사(昌城防禦使)에 이르러, 1624년 이괄(李适)의 난 평정에 공을 세웠다. 이에 진무 공신(振武功臣) 3등으로 학성군(鶴城君)에 봉해졌고, 훈련원 도정(訓練院都正)ㆍ황해도 병마 절도사를 지냈다. 병조 판서로 추증(追贈)했다.

김자정(金自貞) : 진사시를 거쳐 1453년(단종 1) 식년 문과에 정과로 급제, 집현전권지정자(集賢殿權知正字)에 제수되었다. 1455년세조 즉위에 협조하여 좌익공신(佐翼功臣)에 책록되었다. 그 뒤 승문원박사를 거쳐, 1470년(성종 1) 예조정랑이 되어 『세조실록(世祖實錄)』 편찬에 참여하였고, 이어서 장령(掌令)·참교(參校)를 지내며 한어(漢語)의 교육을 강조하였다. 1474년 선위사(宣慰使)로서 대마도에 건너가 왜인문제를 처리하고 돌아와, 1481년노사신(盧思愼) 등과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을 편찬하였다. 이어 대사간을 역임하고, 1483년 경상도관찰사가 되어 대왜문제를 잘 처리하였다. 그 뒤 병조참판을 거쳐 이듬해 충청도관찰사를 지냈으며, 1485년 하정사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이어서 전라도관찰사·대사헌·개성유수를 지내고, 1492년 호조참판이 되었다가 뇌물수뢰 혐의로 탄핵을 받고 곧 동지중추부사로 체직되었다. 1491년 정조부사(正朝副使)로 명나라에 다녀왔으며, 연산군이 즉위하자 하정사로 다시 명나라에 다녀왔다. 이어서 황해도관찰사를 역임하고 1497년(연산군 3) 지의금부사로 무오사화를 처리하여 논공행상되었고, 그 뒤 한성부판윤을 지냈다. 어학, 특히 한어에 능하여 외교업무에 공이 많았다. 시호는 정명(精明)이다.

김덕승(金德承, 1595년 ~ 1658년) : 1619년(광해군 11) 문과에 급제, 벼슬이 시정(寺正)ㆍ목사(牧使)에 이르렀다. 경사(經史)ㆍ운서(韻書)를 깊이 연구하였으며 성력제가(星曆諸家)의 깊은 뜻을 통달, 한어(漢語)에도 능통해서 예조 좌랑 때에 한학 교수를 겸하였고 글씨와 그림에도 조예가 깊었다.

김우항(金宇杭, 1649년 ~ 1723년) : 1675년(숙종 1) 여러 동지들과 상소하여 송시열(宋時烈)을 구한 뒤 5년간 은거, 문과에 급제, 기사환국(己巳換局) 뒤 관계(官界)를 떠났다. 그 후 1694년 폐비 민씨가 복위하자 주로 시강원(侍講院)에서 사서(司書)를 보다가 회양 부사(淮陽府使)ㆍ전라도 관찰사를 지내고, 1703년(숙종 29) 도승지ㆍ예조 참판ㆍ이조 참판ㆍ대사헌ㆍ형조 판서ㆍ병조 판서ㆍ이조 판서ㆍ좌참찬ㆍ우의정 등을 역임, 1722년(경종 2) 김일경(金一鏡)의 사친 추존론(私親追尊論)에 반대하다가 신임사화(辛壬士禍) 때 화를 입었다.

김만덕(金萬德, 1739년 ~ 1812년) : 1739년에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난 김만덕은 열두 살 때 부모를 잃고 어려운 처지가 되었다. 그녀는 기생의 몸종으로 들어간 뒤 관청에 소속된 기생이 되었으나, 스물세 살이 되던 해에는 기생의 신분을 벗고 양인이 되어 객주를 차렸다. 객주란 상인들의 물건을 대신 팔아 주거나, 상인과 상인 간의 거래를 도와 돈을 버는 상인을 뜻한다. 김만덕은 사업 능력이 매우 뛰어났다. 그녀는 객주 활동 외에도 여관과 식당, 특산물 거래 등을 해서 오래지 않아 큰 부자가 되었다. 그런데 당시 제주도에서는 극심한 흉년이 여러 해 계속되었다. 굶어 죽는 백성들이 줄을 잇자, 조선 조정에서 이들에게 나누어 줄 구호 식량을 보냈지만 운반하던 배가 그만 침몰하고 말았다. 이에 김만덕은 그동안 모은 전 재산을 풀어 죽어 가던 제주도 백성들을 구해 냈다. 당시 김만덕이 살린 백성의 수가 1,000명이 넘었다고 한다. 조선의 제22대 임금인 정조는 김만덕의 선행을 전해 듣고 크게 칭찬했다. 또한 “한양에서 임금님을 뵙고, 금강산을 보고 싶다.”는 그녀의 소원도 들어주었다. 당시 조선 사회에서는 기생이었던 여자가 임금을 알현(높은 사람을 직접 만나는 것)하는 것은 꿈도 꿀 수 없었다. 게다가 당시 제주도민들은 섬 밖 출입이 철저히 제한돼 있었기 때문에 김만덕의 임금 알현은 매우 큰 상이었다. 채제공, 정약용, 김정희 등의 학자들은 김만덕의 선행을 기리는 글과 시를 많이 남겼다.

김홍도(金弘道, 1745년 ~ 1806년) : 도화서 화원이 된 후 왕세손의 초상화를 그렸으며, 어진화사(御眞畵師)로 정조를 그렸다. 왕명으로 용주사의 ‘부모은중경(父母恩重經)’ 삽화로 판화를 그렸다. 풍속화를 많이 그렸으며, 조선의 3대 화가로 이름을 날렸다.

김대건(金大建, 1821년 8월 21일 ~ 1846년 9월 16일, 세례명: 안드레아) : 우리나라 최초의 천주교 신부이다. 세례명은 안드레이고, 아버지는 기해사옥 때 순교하였다. 프랑스 신부 모방에게 영세받고 마카오의 파리 외방전교회에서 신학을 공부하다가 필리핀으로 건너가 매스트르 신부 문하에서 신학과 철학을 연구했다. 천주교 박해에도 불구하고 귀국하여 교세 확장에 진력하다가 1845년 상하이에 가서 한국인 최초로 신부직을 받았다. 그 후 청나라 선교부와의 통신연락에 필요한 비밀 항로를 개척하기 위해 답사하다가 체포되어 25세 나이로 사형을 당해 순교하였다.

김여온(金汝溫, 1550∼1592) : 무신. 명종 5년(1550) 공주에서 출생하여 여러 관직을 두루 역임하였다. 그 후 예문관에 있다가 선조 25년(1592)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여러 의병을 이끌고 청주에서 왜군을 물리치는 등의 활약을 하다가 금산에서 전사하였다.

김원봉(金元鳳, 1898년 9월 28일 ~ 1958년) : 의열단을 조직하여 국내의 일제 수탈 기관 파괴, 요인암살 등 무정부주의적 투쟁을 하였다. 광복군 부사령관,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국무위원 및 군무부장을 지냈다. 1948년 남북협상 때 월북하여 노동상,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부위원장 등을 역임하였다.

김상옥(金相玉, 1890년 1월 5일 ~ 1923년 1월 22일) : 서울 출생. 고학으로 배운 뒤 야학을 세워 가르치다가 1910년 경성 영어 학교에서 배우고, 동대문 밖에서 영덕(永德) 직물점을 경영, 일화(日貨) 배척을 목적으로 말총 모자를 연구ㆍ발명하여 공장을 세운 후, 국산품 장려에 진력했다. 1919년 4월 영국인 피어슨 여사의 집에서 <혁신단>을 조직하고, 《혁신공보》를 발간, 구국 운동을 전개했다. 1920년 8월 동지를 규합, 일제의 고관 및 그 주구 암살을 계획했으나 실패, 그 해 10월 상하이에 망명했다. 그곳에서 의열단(義烈團)에 가입하고 1921년 7월 입국하여 충청ㆍ전라 등지에서 임시 정부 의연금을 모집했다. 다시 상하이에 갔다가 1922년 12월 귀국, 1923년 1월 종로 경찰서에 폭탄을 던지고 교묘히 삼판통(三坂通)에 피신하였으나 뒤에 발각되어 고봉근(高奉根)의 집에서, 다음 이혜애(李惠愛)의 집에서 1천여 명 포위 경찰대와 접전, 최후 일발로 자살했다. 1962년 건국 공로 훈장 복장(複章)이 수여되었다.

김대중(金大中, 1924년 1월 6일 ~ 2009년 8월 18일) : 대한민국 제15대 대통령이다. 국회의원 장택상의 비서로 정계에 입문한 후 1960년 민의원, 6·7·8·13대 국회의원이 되었다. 1971·1987·1991년에는 신민당·평민당·민주당의 대통령 후보가 되었으나 낙선했다. 1997년에는 김종필 총재가 이끄는 자민련과 후보단일화에 성공하여 15대 대통령 선거에서 승리했다. 집권 후 국가의 외환위기를 극복하고 경제를 안정시키기 위해 노력했으며 북한 김정일 국방위원장과의 남북정상회담, 6·15남북공동선언을 이끌어내어 노벨평화상을 수상했다.

김종필(金鍾泌, 1926년 1월 7일 ~ 2018년 6월 23일) : 1948년 육군사관학교 8기로 임관, 주로 참모직을 역임하였다. 1971년 6월~1975년 12월 국무총리를 지냈다. 1980년 신군부에 의해 정치활동이 금지되고 부정축재자로 지목되기도 했다. 1990년 노태우·김영삼과 민주자유당을 창당하여 최고위원이 되었고, 1995년 자유민주연합을 창당, 총재가 되었다.

과거급제자
조선시대 과거급제자는 문과 128명, 무과 536명, 사마시 471명, 역과 59명, 의과 39명, 음양과 15명, 율과 33명, 주학 8명이다.